국내 최고령 낙원상가 승강기의 은퇴식낙원상가 전시공간에서 ‘엘레베이션/서큘레이션(elevation/circulation)’ 전시 열려
1968년부터 2020년까지 수많은 승객을 태웠던 낙원상가 엘리베이터 3호기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지난 2020년 9월, 국내 최장수 운행기록을 지닌 낙원악기상가 3호기 엘리베이터가 52년 간의 발자취를 뒤로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낙원상가는 이 승강기를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해 지난달 약 2주 간 실물을 볼 수 있는 전시를 마련했다. 긴 세월 묵묵히 많은 이들의 발이 되어준 엘리베이터의 은퇴식인 동시에 그 안에서 인간과 엘리베이터 사이의 관계에 대해 탐색한 흔적들을 만날 수 있었다.
도심 속 복합문화공간 낙원상가 전시공간 d/p에서 지난달 15일부터 31일까지 ‘엘레베이션/서큘레이션(elevation/circulation)’전시가 개최됐다. 주최측에 따르면 이번 전시는 과거 1969년 낙원상가 준공 당시 설치돼 52년간 운행됐던 ‘엘리베이터 3호기’가 국내에서 최장기간 운행 기록을 남기고 철거되면서 기획됐다. 그동안 일반에게 공개 되지 않았던 엘리베이터 기계실의 몸체들, 모터, 조속기, 감속기, 전자제어 장치들을 볼 수 있는 특별한 자리였다. 이번 전시는 서울문화재단 2021년 예술창작활동지원사업으로 선정된 다원예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낙원상가 지킨 터줏대감…안전기준 강화로 결국 교체 수순 밟아
1969년 낙원삘딍이 준공되던 당시부터 50여 년 동안 운행한 이 엘리베이터는 쉰들러(Schindler)사가 제작한 기계식 엘리베이터(모델명: DC-GD)로, 지난 2020년 9월 국내에서 최장기간 동안 운행한 기록을 남기고 은퇴했다.
오랜 시간을 운행하며 모습도 여러번 바뀌었다. 철거 직전엔 우주선이 생각나는 연두색 시트지로 덮여있는 형태였으며, 승강로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3개로 둥근 사각형 모양의 전망창도 냈다. 시간이 지나며 부품수리와 안전장치 추가, 내장 변화로 겉모습을 조금씩 바꿔가며 버텨왔지만, 승강기 법률 개정으로 더 이상 현재 안전기준을 맞추기 어려워지자 전부교체를 진행하게 됐다.
승차감이나 속도는 현대식 승강기에 비해 떨어질 수는 있지만 승객을 싣고 나르는데 있어 기능적인 문제가 없었기에 교체된다는 소식에 많은 이들이 안타까움을 표했다. 금속가공업체 에이스정공 조양연 대표는 “굉장히 옛날에 만들어졌는데도 부품들이 매우 정밀하게 가공돼 있다”며 “수명이 다 했다기보다 좀더 오래 쓸수 있는건데 교체돼 아쉽다”고 말했다.
엘리베이터는 몸속 혈관과 신경계처럼 건물 공간 사이를 연결하는 매개
엘레베이션/서큘레이션 전시는 엘리베이터를 건축과 인체를 연결하는 메타포로 활용했다. 사물과 사람의 몸을 수직과 수평으로 이동시키는 엘리베이터의 길이 인체에 수직·수평으로 들어차 있는 기관들 사이를 연결하는 혈관과 신경계를 연상시키게 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여기서 떠오르는 감정과 감각들을 설치·퍼포먼스·영상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을 통해 표현했다.
협력 큐레이터를 맡은 이영준 기계 비평가의 ‘도슨트 퍼포먼스’에서는 그동안 공개한 적 없었던 낙원상가 엘리베이터 기계의 각종 부품을 소개하고 기계와 기술, 인간의 상호 접점을 설명했다.
이영준 비평가는 “사람이 도구를 만들기 시작한 이래로 도구는 계속 확장됐고, 도구에 의존하는 인간의 신체와 존재도 확장됐다”며 “엘리베이터는 신체의 연장이자 신체의 한계를 확장해주는 존재”라고 정의했다.
그는 “대한민국에 수많은 건물들이 철거될 때 그 안에 있던 엘리베이터들도 끽 소리도 내지못한 채 무자비하게 같이 철거돼버린다”며 “전시라는 작은 실천을 통해 엘리베이터를 보존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라고 했다.
한편, 이번 전시에서는 엘리베이터의 마지막 운행과 철거 과정의 기록을 비롯해 엘리베이터의 현대사회 문화적 성찰을 담은 영상 감독 송호철의 2채널 다큐멘터리 영상 전시, 첼리스트 이옥경의 낙원상가 안에서 반복되는 순환을 수행하는 택배 수레의 사운드를 기반으로 한 영상 작업도 함께 선보였다. 안무가 이윤정은 혈관과 신경계에 따른 혈액과 호르몬 전달 과정을 안무화한 공연을 진행했다. 이와 함께 ‘엘리베이션/서큘레이션’이라는 제목으로 한양대 남성택 교수의 강연이 열리기도 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엘리베이터는 단순 수직 운송 기계를 넘어, 인간의 한계를 확장하는 도구로 의미를 확장했다. 중력이라는 순리를 거스르고 사람과 화물을 높은 곳으로 올려주는 무모한 기계를 통해 현대인들은 새로운 길을 얻게 된 셈이다.